벼랑에서 도전과 열정으로 일궈낸 행복

유청비나 대표 최상길(한인회 상임부회장) 인터뷰 정재훈 기자l승인2016.04.18l수정2016.04.20 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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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가 열정만 가지고 뛰어들기엔 현실이 만만치 않았다. 노력 끝에 주변의 인정을 받으며 돈도 벌었지만 이내 IMF 사태를 맞으며 모든 것이 무너졌다. 젊은이는 나이 마흔이 조금 넘어서 새로운 터전, 베트남에 도전해 새로운 성공을 일궈낸다.

드라마 같은 이 이야기는 베트남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기업가 최상길 유창비나 사장의 인생사다. 누구보다 격렬하게 살아 온 그는 현재 베트남 직원들에게 존경받는 사장이자 한인회 상임부회장으로 섬기는 삶으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인생을 그에게 직접 들어 보았다.

▲ 베트남에 진출한 계기가 특별히 있었습니까.

-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습니다. 제 이야기이지만 드라마 같아서요. 저는 1968년에 기술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우리나라 경제가 역동적으로 시작되던, 어렵지만 경제가 준비되고 시작되는 시기였어요. 이후로 베트남에 오기까지 짧게 말할 수 없는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 젊은 시절이 파란만장하셨나 봅니다. 일찍부터 사업을 하셨던 건가요?

- 예. 첫 창업이 27살 때였으니까 빠른 편이었습니다. 저는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직장을 다녔습니다. 공부와 일을 병행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열심히 성실하게 해서 주변 친구들보다 빨리 나갔죠. 군대를 다녀와서 사업을 했는데, 인정도 받았고 돈도 좀 벌었었습니다. 1998년에 IMF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는….

▲ 사업이 처음부터 순탄하지만은 않았다는 말씀이시군요.

- 처음에 부산에서 양복점을 차렸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였죠. 경주가 집인데 도시에 나가보니까, 양복점에서 하얀 와이셔츠에 조끼를 입고 일하는 재단사가 얼마나 멋있어 보이던지…. 회사를 다니면서 재단사 공부를 했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께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매달렸지요. 아버지께서 오래 고민하시고 어렵게, 당시로서는 큰 돈인 30만원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양복점을 열었는데 보는 것과 현실은 차이가 있더군요. 어려움을 겪으면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회사에서 다시 오라는 제안이 왔을 때 하던 일을 접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약 3년의 공백만큼 다른 갈등이 있었고, 다시 새로운 곳으로 옮기게 됐죠.

▲ 그 이후로 회사를 옮기셨군요.

- 예. 몇 번 옮겼죠. 마침 서울에서 아라모드라는 백화점이 생기는데, 참신하고 좋은 기술자가 필요하다고 저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총괄개발실장으로 토털 패션을 준비해야 했는데, 매장 오픈을 한 달 앞두고 모든 걸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한 달의 절반 정도는 잠을 자지 않고 일했습니다. 어렵게 개장 준비를 하고 3개월 만에 나왔습니다만,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책임도 무거웠고, 무엇보다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 사업은 어떻게 다시 시작하게 되셨습니까?

- 그 후에 외국계 회사에서 3년 정도 일을 했는데, 2년쯤 됐을 때 한국 지사장께서 '기술적으로도 뛰어나고 사람도 정직하고 성실하니까 사업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그 때 돈으로 700만원을 도와주셨습니다. 거기에 제 자금을 더해 독산동에 공장을 만들었습니다. 그게 우리 회사의 모태입니다. 잠도 안 자고 열심히 해서 그걸 키웠어요. 50명도 안 되는 직원으로 시작했는데 나중에 수백 명으로 늘었습니다. 그곳이 유청물산입니다.

▲ 그렇게 시작해서 베트남 진출로 이어졌던 건가요?

- 베트남에 오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더 있었습니다. 선라이트라는 이름으로 제2공장을 세우고 오가면서 관리를 했는데, 어음을 받은 회사의 연쇄부도에 휩쓸려서 선라이트는 문을 닫았습니다. 2공장에서 못 도와주니까 1공장도 조금 힘들어졌고요.

이후 2년 동안은 파주에 있는 덕수물산이란 곳에 가 있었습니다. 덕수그룹에서 파주에 봉제공장을 만들었는데 잘 안 돌아가고 있었고, 그 상황에 대우 출신 한 분이 제 얘기를 하셔서 불려갔습니다. 기술과 패기만큼은 알아줬으니까요.

처음 가서 보니 엉망이었습니다. 직공들 처우도, 조직 구성도 다 엉망이었어요. 파주의 '주먹'들도 들어와서 방해하고…. 엄청난 혁신이 있어야 했습니다.

▲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 먼저 지역 유지들과 만나 대화했습니다. 이 회사가 없어지면 지역도 힘들다, 이 회사를 잘 키우면 지역 경제에도 좋고 자식들도 일자리 생겨서 좋지 않으냐, 나 여기 오래 있을 생각 없으니 회사만 살리면 된다…. 그렇게 얘기하자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공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생산 시스템을 정비하고 직원들 식사도 영양사 불러서 제공하고 했더니 흑자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적자가 날 공장은 아니었거든요. 그렇게 회사가 정상궤도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1년 정도 있었습니다. 회사에선 저를 잡았지만 '제 사업을 하겠습니다. 하고 싶었던 일이 중요한 거지,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라고 확실하게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래도 놔주지 않아서 사표 던지고 한 달을 도망다닌 후에 전화로 말씀드렸죠. '그거 보십시오, 저 없어도 돌아가지 않습니까'라고.

▲ 그때쯤이 IMF 사태가 있을 때였습니까.

- 그때 블라우스 공장을 새롭게 했는데, 그때 IMF가 터졌고, 완전 거지가 됐습니다. 정리하고 회사를 접었습니다. 50평 살던 아파트는 경매 넘어갔고요.

아내에게 '그래도 동네에선 나름대로 알려진 사람인데 집이 경매되는 모습을 보일 수야 이겠느냐, 사글세로라도 옮기자'라고 했습니다. 넓은 집에서 좁은 곳으로 가려니 짐을 놓을 곳이 없어서 친구 집 옥상에 짐을 맡겨야 할 정도였죠. 그리고는 베트남으로 갔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볼 수가 없었거든요.

그때 제 나이가 40대 초반이었습니다. '나는 자갈밭에 던져져도 자신 있다'고 생각했죠.

맨몸과 1000달러로 베트남에 도전하다

▲ 그렇게 베트남에 진출하셨군요. 어쩌면 운명처럼.

- 한국에서의 일을 정리하고 1998년에 달랑 1000달러 들고 베트남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뭘 한 건 아니었어요. 한국 공장은 없었고 타이완 공장이 몇 개 있었는데, 거의 놀다시피 했습니다. 가동율이 40%가 안 됐으니까요.

▲ 준비된 것도 없이 홀로 단신으로 오신 겁니까.

- 생산라인도 없었고, 들고 온 돈 1000달러 외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작은 사무실에 중고 책상 놓고 나니까 돈이 얼마 안 남아요. 기사 한 명과 여직원 두 명을 뒀는데, 여직원들이 '저희는 무슨 회사입니까' 묻더군요. 무역회사라고 했더니 '무슨 물건 파느냐'고 묻습디다. 조금 있으면 안다고만 했죠.

▲ 베트남에서의 사업은 어떻게 시작하셨습니까.

- 그때 아이디어가 뭐였냐면, 베트남 시장에서 한국 제품을 써 보고 다시 찾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대는 것이었습니다. IMF 때라 어려우니까 한국에선 넥타이, 물안경 같은 걸 묶어서 많이 팔았거든요. 그런 걸 베트남에서 많이 사다가 팔았는데, 가져와서 팔고 나면 다시 찾으리라는 계산이 섰습니다. 한국 제품이 품질은 좋으니까.

시장에서 한국 제품을 찾으니까 스카프, 허리띠, 넥타이…. 굉장히 많이 나오더라고요. 아이템별로 분리해서 보니 허리띠가 좋았습니다. 중국 제품과는 비교가 안 되죠. 그래서 처음에 50개를 시험 삼아 들여오고 그 다음에 500개로 늘려갔는데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잘 됐어요. 나중엔 15일 단위로 5000개씩 받았습니다. 베트남에 다시 들어온 지 한 달이 조금 넘어서 8000달러를 집으로 송금했어요. 집사람이 깜짝 놀라더군요.

▲ 지금과는 조금 다른 사업이었군요.

- 이걸로 계속 한 것도 아니었어요. 금방 따라오니까 아이템을 바꿔야 했거든요. 그리고 나선 물안경을 했습니다. 당시 베트남에선 많이 쓰던 타이완 제품이 있었는데 흰 고무로 만든 것이었어요. 물도 차고 피부가 아플 정도로 착용감도 안 좋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업체에서 만든 물안경을 한 200개 수입을 했습니다. 처음엔 비싸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그래서 몇 군데 다니면서 그냥 줬더니, 전화에 불이 났습니다. 그 제품은 실리콘으로 만든 것이었거든요. 청계천에서 3000원 하던 걸 여기서 1만원씩 팔았어요.

나중에는 너무 잘 팔리니까 청계천에서 사는 걸로는 충당이 안돼요. 그래서 공장에 찾아가서 1만개를 직접 들여왔는데 수입가가 1100원 꼴인 겁니다. 세관에 신고하고 세금을 다 내도 넉넉하게 남는 거죠.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그 이후에도 넥타이핀, 넥타이, 스카프… 뭐 여러 가지 했습니다.

▲ 베트남 말을 원래 잘 하셨나요? 그렇게 사업을 펼쳐가려면 소통이 굉장히 중요할 텐데.

- 처음에 말은 전혀 못했죠. 지금은 잘 하는데, 그때는 전혀. 매일매일 배웠습니다.

▲ 그러고 나서 의류업으로 뛰어드셨나요?

- 이런 방식으로 좀 했는데, 오래는 못 가더라고요. 좀 시들해지는 때에 새로운 아이템을 잡아야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나이키에 신발 쪽 자재를 납품을 하면 좋겠다 싶었는데, 신발을 잘 아시는 분들도 나가떨어질 정도로 경쟁이 심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말했습니다. '베트남에서 조달되는 자재는 베트남 안에서도 살인이 날 정도로 경쟁이 심하고, 한국에서 오는 자재들은 한국인들끼리 경쟁이 심하다면, 제3국에서 오는 자재면 되지 않겠냐'고 말이죠.

신발 앞에 들어가는 습자지 같은 뭉친 종이 있죠? 그건 태국에서 수입을 하는데, 물에 버리면 30분 내로 분해되는 친환경 자재여야만 해서 수입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미국에서 허가가 나온다더군요. 베트남은 환경에 대한 인식이 아직까지 없어서 자체 조달이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딱 보니까 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실험실에서 밤을 새우며 연구를 해서 만들어냈고, 그걸 가지고 나이키로 갔습니다.

그런데 접근이 쉽지 않더군요. 기존 거래처가 있으니까. 그래서 설득을 했습니다. 종이가 화재 위험이 있는 건데, 많은 종이를 보관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거 아니냐는 논리로. 하루에 신발 60만 족이 나오는데 여기에 들어가는 종이가 하루에 컨테이너 하나 분량입니다. 수입을 하면 한번에 얼마나 많은 양을 가져다 놔야 합니까. 위험하죠. 저희는 창고도 필요 없다, 우리가 매일 쓸 물량을 옮기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결국 성사가 됐습니다.

▲ 베트남에 오셔서도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계속된 것 같습니다. 그 사업은 오래 지속이 됐습니까?

- 1년 반을 했습니다. 돈을 참 많이 벌었죠. 그런데 사정이 생겨서 계속 이어가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때쯤 미국이 열리는 기회가 왔어요. 그래서 봉제를 하게 됐습니다.

▲ 지난 세월 굴곡이 상당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인덕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사장님을 믿었던 이유가 뭘까요.

- 저는 정직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직하면 신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비록 돈을 좀 천천히 벌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만나면 누구나 마음의 문을 열지 않지만, 먼저 나를 믿게 하고 신뢰를 쌓는 게 중요합니다.

'유청비나' 설립…마침내 돌아오다

▲ 유청비나를 소개한다면.

- 2001년 공장을 시작할 때 처음부터 크게 시작했던 건 아닙니다. 그 동안의 이것저것 해서 기반은 됐지만 처음에 시작할 때는 아무래도 부족했죠. 1년 정도가 미국이 열렸다고 해도 바로 오더가 들어오는 건 아니니까.

현재는 직원이 모두 700명 정도 됩니다. 주로 블라우스를 하다가 케이스를 늘려갔죠.

▲ 유통은 어떤 방식으로 하고 계십니까.

- 주로 미국으로 나갑니다. 거래 방식은, 순수한 가공부터 원부자재 모든 것을 저희가 다 하는 것까지 다양하고요. 지금은 주로 OEM 방식으로 하지만, 디자인을 직접 하는 것도 있습니다. 오래 하다 보니까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서 바이어에게 먼저 제안할 때도 있죠.

▲ 디자인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주로 얻으시는지요.

- 유행을 전망할 때 소재가 가장 중요합니다. 소재가 유행을 이끌거든요. 또 중요한 게 색, 컬러입니다. 컬러가 고객층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그걸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미리 분석하고, 오더를 받기 전에 바이어의 콘셉트를 읽어야겠죠. 그리고 거기에 맞춰서 개발을 합니다.

디자인은 생활 속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거리의 옷차림을 잘 보면 컬러가 그레이 톤에서 브라운 톤으로 변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 '톤'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유행의 흐름에 있는 컬러를 읽을 수 있는 거죠.

▲ 현재 유청에서 새롭게 선보일 제품에 대해 조금만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 저희는 주로 미국을 겨냥하는데, 현지에서 신축성 있는 소재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몸의 볼륨감을 강조하는 겁니다. 얇으면서도 신축성이 있는 소재, 그에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가고 있습니다.

"함께 회사를 키운 직원들과 함께 좋은 내일 만드는 것이 목표"

▲ 말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는 게 결코 쉽지 않을 텐데요. 어떻게 이끌고 계십니까.

- 베트남 사람과 한국 사람은 다릅니다. 베트남 사람들이 대체로 차분하다면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다혈질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할까요. 마치 음과 양처럼 말입니다. 잘 조화를 이루면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음으로 대하면 '1+1=2'가 아닐 수 있습니다.

서로의 사고가 많이 다르기 때문에 그걸 나누고 소통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저희는 그런 부분을 위한 교육 시간이 있어요. 이들에게 단답식으로 강요하면 잘 안 받아들이는데, 장점을 살려주고 자존심을 세워주면서 얘기하면 잘 받아들입니다.

▲ 유청비나 회사의 계획은

- 돈을 많이 벌어서 개인의 욕심을 채우겠다는 것보다는, 회사를 이만큼 세운 직원들과 함께 잘 사는 내일을 만들고 싶습니다.

▲ 한인회 상임부회장이신데, 한인회의 입장에서 주요 추진 사업이 있다면.

- 사실 한인회 활동도 거의 잘 안했는데, 주변에서 한인을 위해서 일할 때가 됐지 않느냐는 권유들이 있어서 2년 전부터 임원직을 맡고 있습니다.

가장 큰 과제는 그늘에 있는 영세민들의 처우 개선입니다. 이분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시는데, 가장 어려운 점이 비자를 받기가 힘들다는 겁니다. 3개월 단위로 비자를 갱신해야 하는데, 캄보디아 같은 곳에 나갔다 와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어떻게 비자를 완화해서 문제가 없도록 할 수 있는지가 한인사회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정재훈 기자  jtk33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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